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부대표(기후전문가)

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부대표(기후전문가)
고은 사단법인 넥스트 부대표(기후전문가)

[이투뉴스 칼럼 / 고은] 탄소중립의 잔인한 점은 전세계가 동참해야 하는 미션이지만 철저히 자원부국에 유리한 싸움이라는 것이다. 대륙이 광활하여 햇빛과 바람이 남아도는 나라는 저렴한 에너지를 기반으로 탄소중립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와 같이 국토는 작고 에너지 수요가 많은 경제에게 탄소중립은 쉽지않은 길이다. 석유나 가스는 수입·수출이라도 가능했지만 햇빛과 바람은 교역이 불가능하다.

지난 50년간 한국의 제조업은 불리한 비용구조를 극복하는 극한의 효율성, 기술력, 정부의 조력, 그리고 훌륭한 근로윤리가 조합되어 눈부시게 성장해왔다. 그런데 다가오는 탄소중립 시대에는 그 비용구조의 불리함이 극복 가능한 수준을 넘어선다.

철강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사단법인 넥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지금 철강업계와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수소환원제철이 상업화될 경우, 2035년 철강 생산단가가 64% 오를 것으로 전망한다. 값비싼 수소를 수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스웨덴의 H2그린스틸(H2 Green Steel)이나 하이브릿(Hybrit)과 같이 수소환원제철을 가장 먼저 상업화한 철강 업체에서는 25-30%의 단가 인상이 예상된다고 발표하고 있다. 풍부한 재생에너지 자원을 바탕으로 비교적 저렴하게 수소를 생산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원부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탈탄소 시대에 우리나라는 어떻게 제조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원가경쟁력 측면에서의 최적 전략은 잘하는 것에 집중하고 못하는 것은 남에게 맡기는 것이다. 재생에너지가 남아돌아 저렴한 곳에서는 원부자재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우리나라처럼 훌륭한 인적자원과 기술력이 있는 나라는 상품을 잘 기획하고 원부자재를 가공하여 최종적인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강업계가 수소환원제철 이외에 검토하고 있는 안으로 직접환원철(DRI : direct reduced iron, 환원가스를 이용하여 철광석의 산소를 제거한 상태로 불순물이 적은 철원) 기반의 생산공정이 있다. 수소나 천연가스가 저렴한 곳에서 생산한 DRI를 수입한 뒤 국내 전기로에서 용융, 정련 및 후공정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포스코는 사업성 검토를 위해 작년 말 서호주의 HBI(Hot Briquetted Iron, DRI를 보관과 운반이 쉬운 형태로 성형한 제품) 생산기지에 투자했다.

수입 DRI 기반의 생산공정이 확대될 경우 국내에서 제선공정이 필요 없어지므로 단기적으로 지역경제와 일자리 측면에서 급작스러운 변화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쉬운 결정은 아니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구도의 지평은 결코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다. 글로벌 광산업체들은 DRI용 철광석을 생산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고, H2그린스틸은 브라질의 거대 광산업체 발레(Vale), 호주의 리오틴토(Rio Tinto)와 DRI용 철광석 펠릿 공급계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호주에 수소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2017년부터 본격적인 투자를 해오고 있다.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할 경우 해외 중요 생산기지를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오프쇼어링이 저물고 리쇼어링이 확대되고 있지만, 더불어 니어쇼어링(Nearshoring, 인접국으로의 생산기지 이전)과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동맹국과 우방국끼리 공급망 구축)도 대두되고 있다. 모든 밸류체인을 국내에서 소화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산업계가 이제껏 배출량 감축을 위해 연원료와 생산기술의 전환에 주로 집중을 했다면, 앞으로는 전향적으로 생산기지의 재배치, 사업의 축소 및 다각화 등 유연하게 전략을 구상해볼 필요가 있다. 철강뿐 아니라 석유화학, 정유 등 탄소집약도가 높은 다른 업종에도 적용되는 고민이다.

중국에서 조립되어도 1500달러에 팔리는 아이폰은 미국 브랜드인 것처럼, 제조는 비용효율적인 곳에서 이루어지더라도 국내에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핵심공정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산업의 경쟁력은 우리의 것이다. 덜어내고 다각화하는 유연함이 오히려 탈탄소 시대의 제조강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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