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형 생태환경작가

최원형 생태환경작가
최원형 생태환경작가

[이투뉴스 칼럼 / 최원형] 올여름 더워도 너무 더웠다. 신호를 기다리느라 인도에 잠깐 서 있는 것마저 힘들었다. 그래도 버스든 전철이든 타면 금세 시원해진다. 시원한 정도를 넘어 너무 춥다. 추위를 잘 타는 나는 여름에도 긴소매 옷을 늘 가지고 다닌다. 힘든 여름은 농작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올여름 수박, 오이, 시금치에 이어 배추와 무, 양파 등 채소가격이 상승세다. 올여름 집중호우에 이은 폭염으로 채소류들이 제대로 성장을 못 한 탓에 출하량 감소가 가격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채소가격 상승을 이끈 게 온전히 기후 탓이라고 이야기하기엔 미진한 부분이 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벽에 붙어 있는 식재료의 원산지 표시를 볼 때가 더러 있다. 어쩌다 한두 개 재료를 제외하면 대체로 수입산이다. 육류야 수입이 많을 거라는 건 짐작이 간다. 동네마다 그 많은 고깃집에 고기를 어떻게 국내산으로 다 채울 수 있을까? 그런데 고추나 배추가 수입산(중국산)인 걸 처음 알았을 땐 의아했다. 우리의 식문화와 떼래야 뗄 수 없는 게 김치 아닌가. 그런데 왜 김치 만드는데 필수 재료인 배추와 고춧가루마저 수입할까? 2011년 오랜 비와 태풍 등의 영향으로 고춧가루 가격이 2배로 뛰는 소위 ‘고추 대란’이 있었다. 정부는 대책으로 수입 물량을 늘렸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수입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고추 가격은 진정되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생산자에게로 갔다. 가뜩이나 출하량도 줄어든데다 가격 경쟁에서도 밀리니 이후 고추 농사의 인기는 떨어졌고 고추 자급률은 계속 내리막을 걷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고추 재배면적이 2004년에 비해 2023년에 3분의 1로 줄었다. 그러니 우리 식탁에 필수양념인 고춧가루는 더욱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후 때문이라고 눙치면 곤란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올해는 농산물 수입 개방이 결정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 30년이 되는 해다. 작년 추석 무렵엔 사과가 금값이었다. 정부의 대책은 수입 과일 물량을 늘리는 방법을 택했다. 올해는 단지 물량을 늘리는 것을 넘어 관세를 아예 없앴다.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모두 수입하는 전량이 무관세다. 채소도 가격이 오를 때마다 관세를 인하하며 가격을 조정한다. 당장 가격이 안정되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부담이 덜 가서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수입 농산물이 낮춰놓은 가격이 생산자인 농민에겐 직격탄이 되고 작물 재배지가 줄어드는 결과로 돌아온다. 재배지 감소는 다음 해 생산량 감소로 이어지고 결국 가격은 더 오를 수밖에 없다. 여기에 기후라는 변수는 더욱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것이다. 이게 과연 지속가능한 일일까? 누구든 생명 가진 존재는 먹어야 산다. 당장은 수입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만약 우리가 수입해오는 그 나라에 기후든 정치적 불안정이든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기후 위기는 전 지구적인 문제다. 몇 년째 이어지는 브라질 가뭄으로 커피와 오렌지주스 가격이 올랐고, 전 세계 카카오의 70~80%를 생산하는 서아프리카에서 가뭄과 폭우로 생산량이 감소하자 초콜릿 가격도 잇따라 올랐다. 스페인 가뭄으로 올리브 생산이 줄며 올리브유 가격이 올랐고 로브스타 커피의 주산지인 베트남 역시 가뭄으로 커피 가격이 오르는 데 일조했다. 

과일이나 기호식품이야 없어도 생존에 크게 지장은 없으나 곡물의 경우 양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현재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이 19.9%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식량은 단지 먹을거리를 넘어 안보이고 주권이라는 게 실감 난다. 고추 대란으로 고추 경작지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데 그 뒤를 배추가 따르고 있다. 수입 없이 온전한 자급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어찌 됐든 이 땅에서 우리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이 안심하고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있는 제도는 적어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농민 수를 늘리지는 못하더라도 농사를 포기하는 농민은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농민의 삶이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우리도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으로 농가는 99만 9000가구로 백만 밑으로 떨어졌다. 농가 인구는 208만 9000명이다. 우리나라 인구의 4% 남짓한 숫자이다 보니 농민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도시 소비자가 농업 정책에 관심을 기울이고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지 않을까? 투표 때 농업 정책을 공약으로 내놓도록 후보들에게 요구하고 기후로 농사를 망친 농민들을 보호할 장치를 정부가 마련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유럽의 경우 농가 소득 중 보조금 비율이 70~80% 정도인데 우리나라 농업 보조금 예산은 3조1000억원 정도라고 한다. 턱없이 낮은 보조금을 5조원까지만 늘려줘도 살만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수입 농산물보다는 국내산 농산물을 구입하는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농사를 짓기만 하면 사줄 소비자가 있다는 믿음이 농민들에게 얼마나 큰 비빌 언덕인지 도시 소비자들이 그 심정을 이젠 알아야 한다. 논과 밭을 볼 수 없는 도시에 사는 소비자는 올여름 우리가 흘린 땀의 몇 배를 더 쏟았을 농부의 노고를 상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우리 모두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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